오페라 페스티벌 멍하니 창 밖을 보다가




처음으로 오페라를 보러 간 건 룩셈부르크에 살 때의 일이었다. 

TV나 인터넷으로 훔쳐본 적은 있지만 직접 가 본 적은 없었다. 

어쩐지 돈이 많이 들 것 같았고, 공연을 보는 데 준비가 많이 필요한 것 같았다. 



길을 걷다 룩셈부르크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푸치니의 라보엠(La Boheme) 공연이 있다는 포스터를 발견했다.

'보헤미안'이란 말만 들어도 설레는 나는 처음 보는 LIVE 오페라로 완벽하단 생각이 들었다. 


런던에서 만난 언니에게서 선물 받은 쟂빛이 섞인 긴 붉은 드레스를 꺼내입고, 화장을 했다. 

주말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쉬고 싶어하는 그를 방해하기 싫어서, 나만큼 보고 싶어하지 않아서 혼자 다녀오겠다 했다. 

차가 없을 때였으므로 (10년 넘은 그의 차는 아일랜드 어머니 댁에서 쉬고 있을 때였으므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중앙역에서 그 마을로 가는 기차를 타고 공연장을 찾아야 했다.

한 시간 정도면 찾을 수 있겠거니 했다. 

오페라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던 마사지사였던 친구는 무척 가보고 싶지만 (공연 티켓이 비싸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같이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다섯 번 옮기면서 단 한 번도 첫 하교길에 길을 잃지 않은 적이 없다. 

부모님과 할머니는 나중엔 놀라지도 않으셨다. 

"또?"

하셨다. 

무릎에 상처가 나 울며 집에 오는 내 모습에도, 남자 아이들이 놀렸다고, 

여자 아이들이 따돌렸다고 울며 돌아오는 내 모습에도 익숙해 하셨다.

"또 울어?"





그러니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동네의 모르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을 

처음으로 가는데 길을 잃지 않을리가 없었다. 






 
기차역에 내렸는데 휑했다. 

룩셈부르크인(시내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으므로 외국인들이 아니었을 것이다)들 네댓 명이 역에서 내리고 

어딜 가는지 확실히 아는 듯한 빠른 걸음으로 각자의 집으로 가버렸다. 

누구에게 무얼 물어야 할지 모르는 나는 길을 잃었다. 



길을 많이 잃어봐서 좋은 점은 

길을 잃어도 나 역시 그리 놀라지 않게 된 것이다.

그저 또 허탈한 웃음이 났다.



시내에서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어는 몰라도 프랑스어나 독일어는 알아야 

길을 물어보고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인터넷이 잡히지 않는 별로 안 똑똑한 스마트 폰으로 어떻게 겨우 위치를 파악했던가... 

아마 스크린샷 몇 장으로 알아냈을 것이다. 그렇게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난 한 정거장을 지나쳤거나 덜 가 내린 것 같았다. 

버스가 아닌 기차 정거장으로... 


그러니까 버스로는 여러 정거장을 거쳐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콘서트장이 있었다. 

공연 시작 시간까지 10분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도, 버스가 언제 오는지도 모른다.



'그냥 집에 갈까...'


생각했지만 차려입은 옷과 그린 얼굴이 아까웠다. 

'1막은 놓쳐도 2막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직원이 융통성이 있다면 날 살짝 들여보내주지 않을까?'



그래서 씩씩하게 공연장이라고 생각되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마당에서 정원일을 하던 동네 사람에게 어찌어찌 영어로 묻고 어찌어찌 프랑스어로 답변을 들어 방향을 잡았다. 



30분이나 걸어야 했지만 엄마가 굳이 한국에서 보내준 굉장히 편한 웨지힐 샌들 덕분에 발이 망가지진 않았다.

도착한 공연장은 크지 않았지만 작지도 않았고, 화려하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좋은 곳이었다. 

직원에게 다가가 공연이 시작되었냐 물으니 내 차림을 흘끗 보고는 나보다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공연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그런데 규정상 공연 중에 입장시켜줄 수는 없다 했다.


이미 예상하던 것이었고, 내가 공연을 하는 사람이라도 도중에 들어오는 관객이 반가울리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10분인가 20분인가를 기다리면 1막이 끝나니 기다려달라고 프랑스어 억양이 섞인 직원이 말했다. 


바 같은 것이 보여 화이트 와인을 주문하고 머쓱해 그들의 눈길을 피해 홀의 구석진 곳들을 구경했다. 

수십 년 전 룩셈부르크 건물과 집들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놓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사진들을 보며, 차려입은 내 모습이 비치는 엘리베이터의 유리를 보며 풋 웃다가 

인터넷으로 이미 들어 알고 있는, 가장 듣고 싶었던 곡이 멀리에서 들리는 걸 느꼈다.



휴식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매우 평범한 차림의 그들의 모습에, 아주 어린 아이와 아주 나이 많은 사람들이 섞인 모습에, 

동양인은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에 어색함과 특별함, 친근함과 창피함을 느꼈다. 


동네 사람들이 "그럼 어디 한 번 기분전환이나 해 볼까?" 하며 느린 걸음으로 걸어와 공연을 보고 

역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는, 그런 편안한 분위기였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오페라를 보러 간다고 한껏 차려입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붉은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혼자 온 외국인, 

게다가 동양 여자인 내게 시선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2막을 봤다. 

이탈리아 노래가 나오는데 무대 중앙 가운데에 프랑스어였는지 독일어였는지, 

아님 둘 다였는지의 자막이 등장하는 것이 신기했다. 

영화관에서 이중 자막이 나오는 것도 신기한 나라였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프랑스어였던 것 같다.



이름이 알려진 오페라 가수들의 이름도 잘 모르니까 그때 공연을 한 이들의 이름도 모른다. 

뚱뚱한 가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모두 프랑스인 같다는 이상한 생각도 했다. 


인터넷엔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들의 공연들이 떠다닌다. 

그들의 목소리로 공연을 보고 들은 터라 실제 접한 이들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뭐랄까... 

어쩐지 조금은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영혼이란 그런 것일까?

아님 그저 내 귀의 편견이었을까?






며칠 전에 두 번째로 오페라를 보러 갔다. 

정확히는 리사이틀이었으니까 두 번째로 치면 안 될지도 모른다. 

정식 오페라를 보기엔 아직 딸이 어리다. 


딸이 어린 것과 공연을 보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면... 

정식 오페라 공연의 시작 시각은 아기가 자야 하는 시간이니까.



열두 시에 정원이 아름다운 곳에서 알려진 곡들을 부른다는 말에, 

비싸지 않은 가격인지라 남편과 함께 가보기로 했다. 

아이리시 맘께 세 시간 동안 딸을 맡길 수 있어 한낮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공연은 한 시간이었지만 오가는 시간이 그리 걸렸다.



공연은 피아노가 도착하지 않아서, 

두 번째 피아노(아마도 키보드겠지)는 작동하지 않아서 40분이 넘게 지연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그들의 목소리를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직원들이 우르르 입장하는 조금 화가 난 관객들의 표와 자리를 일일이 확인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의자가 부족해 카펫이 깔린 계단, 공연하는 방이 보이는 홀의 계단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조차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들도 그 자리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미안해 하는 가수들에게 예의바른 미소를 보냈다.


고장난 요즘 피아노 덕분에 오래된 진짜 피아노를 볼 수 있었고, 

옮겨진 자리 덕분에 더욱 아늑한 분위기에서 

마이크 없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덧글

  • 솔다 2017/06/07 18:05 # 답글

    우와, 공연장 주변도 너무 예쁘네요 ;ㅅ;
    가벼운 옷차림으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도요!
  • Jl나 2017/06/07 18:27 #

    어느 오래된 집이에요. 역시 정원을 대중에게 개방하네요.
    그러게 말예요. 이번엔 살짝 갖춰입은(예쁜 여름옷으로) 사람들이 많았어요.
    일곱살쯤 된 예쁜 여자아이를 가진 아일랜드 엄마랑 영국에서 자랐다는 그리스 남자 오페라 가수가 함께 공연했어요.
  • 더카니지 2017/06/07 18:58 # 답글

    헉 지나님 대단하셔요!!! 오페라라는 예술적 정수를 즐기기 위해 진짜 낯선데를 홀로 가시다니!! 사실 저도 길치인지라 길 읺고 방황할 때 두려움, 고독감을 너무나 잘 알아요ㅠ 그래서 헤외여행 갈때면 항상 철저하게..홍콩서 지하철 탈때 혹시나 길잃을까 꽤나 초조해하며 신경질적으로 변했던게 기억나네요ㅎㅎ

    건물과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네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깔끔하고 세심한 면모가 돋보여요~~
  • Jl나 2017/06/07 19:10 #

    오래된 것, 변색된 것, 껍질이 까진 것, 녹이 슨 것... 모두 잘 간직해 아름답게 보여주는 거 부러워요.
  • 아롱이 2017/06/08 13:35 # 답글

    뉴욕 MET에서 오페라를 보았는데 관광객이었음에도 대강 꾸미고 갔는데 진짜 성장한 사람부터 캐주얼까지 다 있는게 더 좋아보였던 기억이 나요~ 차려입는 것도 나를 위해 좋고 편하게 오는 것도 편하게 보기 위해 좋고~ ^^
  • Jl나 2017/06/08 15:29 #

    뉴욕이나 런던의 큰 공연장은 차리고 가는 게 예의인 것 같았어요. ^^
  • 아롱이 2017/06/08 18:08 #

    ㅎㅎ 정말 꾸밈의 정도가 폭넓어서 놀랐어요. 디즈니 영화에서 나올 것 같은 드레스차림부터 캐주얼까지 ㅋㅋㅋ
  • Jl나 2017/06/08 22:59 #

    한 벨하고 한 백설이 하던가요 ㅎㅎㅎㅎ 재밌겠다 그죠 ㅎㅎㅎㅎㅎ
  • 션이다 2017/06/21 20:59 # 답글

    집이 엄청 멋지네~ 풍경도 좋다 ㅎ
    단발머리 니 사진보고 허걱!! 했네. ㅋ
    10년 전 봤던 니 모습이라.. ㅋ (나이 좀 먹어라! ㅋ)
    그래 오페라는 어떻든?
  • Jl나 2017/06/22 16:44 #

    단발머리가 아니고 묶어 올린 거거릉?
    옥수수알처럼 알차게 나이먹고 있다. 코때까리야.
  • 지나 2017/06/25 04:34 # 삭제

    아참 질문에 답을...

    Cinema paradiso, summer time, puccini 같은 알려진 곡들을 발 앞에서 들으니 좋았지. 그리스, 아일랜드 곡 외에 여러 언어가 등장했어. 아늑한 방에서 음향 기계 없이 옛날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던 방식 그대로 접할 수 있어 행복했어. 귀하게 느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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