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할머니 (6) 과거가 괴로운 것이냐 하면





할머니의 노래 부를 사람 없냐는 질문에 캐나다 아가씨가 손을 들더니 "I have a song" 했다. 

그러더니 이 곡은 다들 잘 알 것이니 함께 해달라 했다. 

화음을 위해 태어난 곡이니 화음도 넣어달라 했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했다. 


고운 목소리와 자신감을 가진 그녀였지만 처음 듣는 노래였다.

사람들도 '응? 모르겠는데?'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냥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옆에 앉은 캐나다 친구가 도와주려고 했지만 그도 화음을 넣는 건 어려워 했다. 

후렴구가 반복되자 사람들은 함께 흥얼거렸지만 가사를 몰랐으므로 뭔가 어색하게 흘러갔다. 

노래가 끝나자 일동 '아하하... 따라부르지 못해 미안하네' 하는 듯한 박수를 보냈다. 


할머니는 또 부를 사람 없느냐 했다. 내 눈을 살짝 마주치더니 먼 산을 보시며 

"다른 언어로 된 것도 좋은데..." 하셨다. 

'지금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세요?' 라 생각하며 잠시 고민하다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오래된 한국 노래예요."

하니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쳐다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취미 삼아 옮긴 적이 있는 '봄처녀'였다. 

중학교 독창 대회의 주제곡이기도 했다. 


첫 구절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어색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차분해졌다. 짧은 노래를 천천히 불렀다. 


변성기였는지 가성도 진성도 나오지 않아 실망했던 중학생이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 곡의 가사가 아름답다고 느낀 건 어른이 되고 나서의 일이었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노래가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생각보다 큰 박수를 받아 놀랐다. 


누군가 어떤 곡이냐 했고, 

이에 어떤 곡 같으냐 되물으니 사랑 노래가 아니냐는 답이 돌아왔다.

물론 그렇지만 봄과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곡이라 하니 미소가 돌아왔다.



할머니는 "내 공책 어디 갔냐" 하시며 돌리고 있느냐 물으셨다. 

준비해 온 시나 글, 하고 싶은 말 등을 돌아가며 적는 공책이었다. 

그런 공책을 가질 수 있는 할머니가 부러웠다. 

좋은 것이든 별로인 것이든 여러 사람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남긴 몇 개의 글들에 미소가 지어졌다. 

할머니의 솔직함, 좋은 시간을 선사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었다. 

다음 사람에게 넘겨야 하니 아쉽지만 오래 들춰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무얼 적을까 망설이다 봄처녀 가사를 영어로 썼다. 

직역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이 사람들이 얼마나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원래 가사에 최대한 가깝게 알려주고 싶었다. 

너무 오랜만에 노래를 부른 직후라 그런지 이상하게 손이 떨렸다.

글씨가 원하는 대로 예쁘게 써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본인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불그스름한 그림이었는데 뭔지 잘 모를 추상화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도 너무 솔직한지 빈 말로도 "아 좋네요. 잘 그리셨네요"라는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할머니는 '별로 마음에 안 드나보지?' 정도의 표정을 지으며 그리 실망한 기색 없이 그림을 내려놓으셨다. 

그 광경에도 어쩐지 안도하게 되었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보여주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구나... 




나이 든 사람들을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궁금한 게 너무 많았던 나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잘 알 것 같은 사람을 찾아헤맸다. 

인생의 정답은 모르더라도 나보다는 많이 알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살면서 모든 사람이 나이와 비례하게 성숙하거나 멋있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보다 오래 살고 경험해 더 많은 것을 알 것 같은 분들을 좋아한다.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할머니의 얘기를 듣던 중 할머니께 

"저... 질문을 해도 될까요?"

하니 물론이라고 하셨다. 


"한국의 어느 작가는 정말 좋은 게 있으면 숨겨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아주 귀하고 소중한 건 함부로 공개하는 게 아니라고요.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음... 그래. 어느 정도는 일리가..."

까지 말씀하셨는데 내가 성급하게 끼어들고 말았다. 


"사람들은 베껴요. 영감을 받는다,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말로 좋게 포장하지만 

결국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베끼고 있어요.

그런 게 너무 지긋지긋해진 전 제가 일한 것을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곳에 공개해버렸어요."


'그리고 그들이 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삼켰다. 


"어떤 이는 그게 미친 짓이라고 해요. 저더러 정신 나갔느냐고요. 그런 걸 왜 공개하느냐고 했어요.

...제가 잘못하는 걸까요?"


할머니는 잠시 말이 없으셨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무 한꺼번에 말을 많이 했나, 또 눈에 띄고 말았나 싶어 아차 싶었다. 

할머니는 

"뭐든지 시도해 보렴. 

하지만 규칙을 깨려면 우선 그 규칙을 완벽하게 익힌 후에 깨렴."

이라 하셨다. 


'...그러고 있어요...'

라 생각하며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딘가에서 본 글귀이기도 했다. 

후련한 답은 아니었지만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말씀은 안 하셔서 

아주 조금 안도했다.




그 자리가, 그 공기가, 그 향이 너무 좋았고, 

그래서 끝까지 남아있고 싶었지만 이젠 시간이 부족했다.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죄송해요. 기차를 타야 해서요... 룩셈부르크로 가야 해요."

하며 일어서려 하자 할머니가 내가 지금 읽으려는 글을 듣고 가라고 하셨다. 

특별히 나를 위한 것이라 하셨다.


마음이 급했으므로 할머니께서 들려주시는 글들을 

제대로 느끼고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충 이런 것이었다. 

어떤 이의 글에서 단어 하나씩을 가져와 또 다른 글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해 주시는 것이었다. 

결국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이는 없는 것임을 알려주시는 듯 했다.


할머니에게 감사를 전하며 건강하세요 했더니 내 눈을 똑바로 보시며 

"또 오너라."

하셨다. 


순간 콧등이 찡했다. 

'할머니... 또 언제 올 수 있을까요? 또 와도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를 생각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네" 했다. 


할머니는 

"난 여기 이 자리에 있을 거야. 아무 데도 안 가. 

잘 지내고 언제나 주머니에 시를 넣어다니렴. (Keep a poem in your pocket)"

이라고 끝인사를 하셨다. 


나도 할머니 연세가 되어도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음 좋겠다 생각했다.

사람들과도 아쉬운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서로가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인연들임을 잘 알았다. 


책방을 나서기 전, 그곳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었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쪽지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아주 행복했던 날, 아일랜드에서 살던 그해 겨울 해가 가장 짧았던 그날, 

모든 창을 붉게 물들였던 그날의 사진이 담긴 내 명함 한 장을 

작은 도서관에서 뽑아들었던 옛날 일기책 속에 끼웠다. 

그리고 그 책을 잘 보이지 않는 책장 한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발견될지 안 될지... 

아무도 모른다. 






거의 달리다시피 해 겨우 올라탄 기차 안에서 그날 

내 마음을 가장 흔들었던 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렸다.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한단다. 
(It's all there. It's already there.)

인간은 아무것도 만들거나 발명하지 않아. 
(We never make or invent things.) 

인간은 그저 그것들을 찾아낼 뿐이야. 
(You just "find" them.)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들이 겸손이 뭔지를 알게 될까. 
(If we think it that way, we might be able to learn some "humility".)

감히 내가 이런 걸 창조했어라고 말하지 못하겠지." 
(I mean those who say they "created" something.)



 



  
























그렇게 혼자 여행이 끝났다. 







덧글

  • 꺄봉 2015/11/05 23:43 # 답글

    아 글을 읽다가 제가 그곳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또 그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기분이예요~~^^* 제 주머니에도 시집을 쏘옥 담아 가을날 앉아 읽고 싶어집니다
  • Jl나 2015/11/06 16:00 #

    기쁩니다. ^^

    그냥 떠오르는 글귀가 있음 종이에 적어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어쩐지 기분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가을이 가기 전에 어서...
  • 솔다 2015/11/07 00:57 # 답글

    마법의 계절이 맞아요! 정말 멋진 광경을 읽었어요. 덤블도어의 세숫대야 같아요. 정말 멋진 책방, 닮고싶은 주인 할머니셔요!
  • Jl나 2015/11/07 16:45 #

    솔다님은 꼬집어 주고 싶습니다 ㅎㅎㅎ 귀여워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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