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할머니 (5) 과거가 괴로운 것이냐 하면




참으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누군가는 그냥 할머니를 만나러 온 친구라 했고, 

캐나다에서 온 남자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사람들을 돕는 국제 기관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남자가 더 성실하고 건전해 보였다.

파란 손톱이 시선을 사로잡던 게이인 듯한 남자 미용사도 있었고, 

파리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이 모임이 너무 좋아 몇 개월째 일요일마다 오고 있다고 

신나게 말하는 인도인도 있었다. 

누가 봐도 글 쓰는 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의 아저씨도 있었고, 오페어도 있었다. 

스웨덴 남자가 본인을 '오페어'라고 소개하자 할머니는 "뭐라고?" 하셨고, 

남자가 살짝 웃으며 "베이비시터(유모)요" 했다. 

할머니는 '오... 흥미롭군. 참 세상 많이 변했어'를 생각하시는 듯한 

음성으로 "오오... 그래?" 하셨다. 

남자 유모가 둘이나 있었고, 

두 사람 다 조금 놀라워 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오히려 즐기는 듯 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을 당당히 밝히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그 누구도 나이나 국적, 직업, 학력으로 소외되지 않았다. 

모두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걸로 완벽했다. 충분했다.       


나는 "번역을 하고 있고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소개했다. 

일단 내 맘대로 번역가(Translator)와 카피라이터(Copywriter)를 합친 

Transwriter라는 직함을 사용하고 있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면 설명이 길어질 게 뻔하므로 

대부분은 그냥 번역가라고 소개하고 넘어간다. 

게다가 Writer라는 말이 주는 무게는 내게 여전히 너무 크고 버겁다. 

이상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난 스스로를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작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룩셈부르크에 살고 있단 말도 역시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 그냥 건너뛰었다.  



할머니는 본인을 하프 잉글리시, 하프 웰시라고 소개하셨다. 

웨일즈인의 피가 흐름을 자랑스러워하시는 듯 하다가도 누군가의 "그럼 웨일즈어도 하세요?"

라는 질문엔 "아니. 내가 왜 그런 걸..." 

이라며 강한 잉글랜드 억양으로 말씀하셔서 아주 잉글랜드인 같기도 했다. 


이 책방의 역사를 소개해 주셨고, 사진도 보여주셨다. 

헤밍웨이를 포함한 수많은 작가가 이곳을 거쳐갔으며, 

제임스 조이스가 책을 출판한 곳이라는 말씀엔 조금 놀랐다. 

옛날엔 책을 펴는 곳이기도 했구나... 그런데 아일랜드인이 어쩌다가 

프랑스 파리까지 와서 책을 내게 되었는지 의아했다.

이들은 그 옛날부터 국경과 언어에 대한 경계가 그리 모호했던가 싶어 부럽기도 했다.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준비된 시가 있으면 들려달라 하셨다. 

누가 시를 준비했느냐 하니 몇 명의 남자가 손을 들었다. 


한 젊은 남자가 노트를 펼치더니 낮고 진지한 모습으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시니까 더 분위기와 감정을 잡는 듯 했다. 


남자가 세 줄 정도를 읽었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대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아, 크게 읽어!!"

하셔서 일동 웃음이 터졌다. 


할머니는 늙어서 귀가 잘 안 들리니 크고 또롱또롱하게 다시 읽으라고 명령하셨다. 

시인의 분위기를 잡고 뭐고는 없는 것이었다. 

그저 또렷하고 당당하게 읽어야 했다. 


남자가 낭송을 마치고 사뭇 기대하는 표정으로 할머니를 쳐다봤다. 

할머니는 몇 줄을 다시 물어보고 혼자 중얼거리며 운율을 맞춰보시더니 

"음... 좀 작업이 필요하겠어... (=노력이 더 필요해)"

라고 말씀하셨다. 흔한 칭찬 한 마디 하지 않으셨다. 

남자는 실망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본인은 꽤 노력해서 썼고, 잘 썼다고 생각했을텐데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 다음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접어둔 종이를 펼치더니 시를 읊으셨다. 

안타깝게도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귀 기울이는 사람들의 모습, 

할머니의 표정, 시를 읽는 남자의 수줍은 진지함 같은 것만 기억 난다. 

낭송이 끝나면 잔잔한 박수가 울려퍼졌다. 

할머니는 시마다 짧게 소감을 밝히셨지만 평가한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다만 시의 기술은 많이 알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남자는 

"시는 준비하지 못했지만 원하신다면 제 쇼핑 목록을 읽어드릴 수는 있어요."

해서 웃었다. 

남자는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정말 시를 읊듯 

"우유, 계란 6개, 양배추, 당근, 화장실 휴지..."

등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마지막 물건엔 잠시 뜸을 들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읽으니 정말 시 같았다. 

대체로 젊은 우리는 남자의 기발함에 키득거렸고, 

할머니는 '흠, 뭐...' 정도의 반응을 보이셨다. 
 

할머니는 지나가듯, 혼자말을 하시듯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셨다. 

영국 문학을 이야기하다 아일랜드 문학을 이야기하기도 하셨다. 

그러다 

"아일랜드인들이 그렇게 힘 있는 글들을 쓸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처지 때문이었을지도 몰라요. 

그 고난과 수탈, 슬픔... 그런 것들이 그렇게 많은 작품을 탄생하게 했는지도요."

라고 하셔서 좀 놀랐다. 

아일랜드 문학에 대한 영국인의 생각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이제 더 들려줄 시가 없으면 노래를 해도 좋다고 하셨다. 

'노래라고?' 하며 쭈뼛쭈뼛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그럼 내가 먼저 하지' 하듯 

할머니는 Molly Malone을 부르기 시작하셨다. 아는 사람들은 어서 따라부르라 하셨다. 


반은 잉글랜드, 반은 웨일즈인인 할머니가 아일랜드 전통 노래를 부르셨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캐나다 아가씨는 모든 가사를 알고 있었다. 나도 반 정도를 따라 불렀다. 



모든 게 이상한데 기분 좋은 시간이 

다양한 사람의 음성 속에 흘러갔다. 












덧글

  • 솔다 2015/11/07 01:01 # 답글

    쇼핑목록을 시로!
    어릴 적에 웨일즈 언어를 잃어버리고 있어서 걱정이라는 웨일즈 관련 기사를 읽은 적 있어요. 영국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음, ㅔ네 ㅎ.

    정말 기묘한 책방이네요. 신기해요!
    진짜 미스마플 같은 분위기의 주인이셔요
  • Jl나 2015/11/07 16:45 #

    (...미스마플이 누군가 검색해 보기로 한다.)

    작은 나라 언어들은 사라지고 있어서 안타깝지요.
    언어 장벽이 얇아져서 좋은 점도 있지만 자유로운 뒷담화의 자유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ㅎㅎㅎ

    아일랜드인들도 아이리시 잘 못해서 좀 안타깝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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