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할머니 (3) 과거가 괴로운 것이냐 하면




내려오는 길에 까페에 들러 라떼를 마셨다. 

불어로 '까페 라떼'를 뭐라고 하더라 고민했더니 주인 아저씨가 '꺄페 올레'라고 정정해 주셨다.

이탈리아에 갔을 때 시아주버님이 아일랜드에서 하듯 자연스레 '까페(Cafe)'를 떼어내고 

'라떼(Latte)'를 달라고 했다가 뜨거운 우유가 컵 한 가득 나와 가족들이 폭소했던 기억이 났다.

결국 본인 잘못이었으므로 민망해 하며 그저 우유만 마시셨다. 


프랑스 음식만 먹고 살 수 있는 위장이 아니었으므로 오늘 점심으론 비교적 찾기 쉬운 일식집에서 

국물이 있는 요리를 먹으려 했는데 초밥만 나오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대신 들어간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으니 몸이 따뜻해졌다. 

나 외엔 손님이 없어 혼자 그곳에서 밥을 먹는 것이 좀 불편하고 걱정될 무렵 

두 테이블 손님이 들어와 안도했다.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듯한 동양인 웨이트리스는 내게 중국어로 인사하다 얼른 영어로 바꿨다.

정성스레 음식을 내어주던 식당 주인이 계산서와 함께 배가 볼록 나온 아저씨가 달린 열쇠고리를 주셨다. 

'아... 중국 설날 축하 주간이구나...'


유럽인들은 여전히 '구정', '설날'을 '중국설(Chinese New Year)'이라고 부른다.

내 귀에 훨씬 예쁘게 들리는 Lunar New Year라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거리에도 붉은 등이 가득했다. 중국식 퍼레이드 겸 축제도 열리는 듯 했다. 

이제 정말 해가 바뀌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남의 나라에서 맞는 설날은 참 묘하게 이국적이었다. 

떡국도, 한복도, 세배도 없다. 

오래된 유럽 건물에 달린 붉은 등과 중국인, 배 나온 아저씨 열쇠고리가 있다.




룩셈부르크로 가는 기차는 네 시간 후에나 떠나는 것이었다. 

이젠 두 번째로 가기로 했던 곳만 천천히 보면 되겠다 싶었다. 

꽤 성공한 좋아하는 영화에 나왔으므로 분명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래도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 책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어과'를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문학 소녀였으리라 생각하는 듯 했다.

오해다. '영문과'가 아니었으므로 영미 문학은 많이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이 아니었다.

셰익스피어, 헤밍웨이보다 토익 점수와 회화 실력이 중요한 시절에 대학을 다닌 것이다. 


나 자신도 오래된 책들을 조각내고 분석해 시험을 치는 행위는 상당한 시간 낭비라 생각했고, 

되도록 실용적인, 한 마디로 사회에 나가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을 기르는 데 치중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세상에 없는 영어로 글을 쓴 작가들의 책을 들춰보기 시작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서른이 넘어서의 일이었다. 


스물 일곱(여덟), 키스 자국이 가득한 오스카 와일드의 묘비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신나하던 아이는 그냥 그 사람의 이름이 좋았을 뿐이다.


그가 태어난 나라에서 살아보고, 그의 책을 읽고, 그가 한 말들을 생각하고, 그가 산 삶을 느낀 후 

서른셋(넷)이 되어 아일랜드 가족들과 다시 찾은 그의 묘지는 다른 감정을 일으켰다. 

무수하던 키스 자국은 지워졌고, 자리도 바뀐 것 같았고, 작품 같던 묘비의 크기도 줄어든 것 같았고, 

한때의 피에타처럼 유리에 갇혀 있었다. 

무심한 사람들로부터 보호는 받고 있었지만 그는 과연 더 행복할까 싶은 모습이었다. 


용기 있는 사람이어서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똑똑한 사람들에게 끌린다. 

게다가 뻔뻔한 유머 감각도 있었다.

그 사람이 쓴 책이 좋아서라기보다 그 사람 자체, 그가 살아온 삶에 끌리면 

그냥 그 사람이 만든 것들 대부분이 좋아진다. 

부족한 것조차 그냥 그 사람이 만든 것이니 만족하고 만다.   

부족한 것조차 이해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작가의 수는 아주 적다. 




















서점은 생각보다 찾기 쉬운 곳에 있었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들어간 간판에, 오래된 일기가 분필로 쓰여진 모습에, 

헌책들이 쭈르륵 진열된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헌책들 중 네 권을 골랐다. 

오스카 아저씨의 연극, 플라톤의 편지, 에밀 졸라, 자전거로 여행한 잘 모르는 작가의 것이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니 예상대로 북적이고 있었다. 

계산대의 젊은 남자가 "도장 찍어줄까요?" 하길래 뭔지도 모르면서 "예? 예..." 했더니 

셰익스피어 아저씨 얼굴이 크게 들어간 도장을 책마다 찍어줬다. 

그것만으로도 책들이 더 특별해지는 것 같아 기뻤다.   


오래되고 예쁜 서점이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유명해지면 잃는 것이 생길 수밖에 없다. 
 

2층은 좀 덜 번잡할까 싶어 얼른 걸음을 옮겼다. 2층은 조금 덜 분주하고 더 예뻤다.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카메라에 엑스 표시가 된 그림이 보여 한숨을 내쉬었다. 

망설이며 구석 자리에 앉아 괜히 아이들 책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도 참 많은 관광객이 오르내렸다. 


한국어도 들렸고, 일본어도 들렸다. 

"이게(이런 서점) 영국인들이 잘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야"라고 주위에 다 들리게 말하는 

무례한 미국 여자애의 목소리도 들렸다.

대부분은 그곳을 힐끗 훑고 사진 몇 장을 찍더니 내려갔다.

자꾸 한숨이 나왔다. 책을 사거나 읽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벽에 적힌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

란 글귀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 잠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가 

두어 번 읽고 이해한 뒤 슬며시 미소 짓고 있었는데 

큰 카메라를 맨 프랑스 남자가 올라오더니 너무도 당당하게 서점 구석구석을 철컥철컥 찍어 

조금 황당한 웃음이 났다. 그 남자 덕분에 나도 따라 슬며시 서점의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 

카메라 배터리가 다 되었으므로 부실한 태블릿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 남자와 Camera Hi도 했다. 

사진을 찍는 자기 모습을 찍는 내 모습에 잠시 놀란 남자는 피식 웃었고, 

나도 그냥 좀 민망해서 괜히 벽에 적힌 글귀를 손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스윽 읽어보더니 내 얼굴을 보곤 

'대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또 웃고 말았다. 

남자는 "I... don't get it." 하더니 내려갔다. 

난 그렇게 모르는 걸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도 좋아한다. 

내가 그에게 뜻을 설명해 주는 건 주제넘는 짓인 것 같아 말았다.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아있었다. 

더 가고 싶은 곳도 없었고, 쌀쌀한 날씨 속에서 방황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다. 

어제 꽤 걸었기 때문에 다리도 아팠다. 
   
무엇보다 어쩐지 그 서점에서 빨리 나가고 싶지 않았다. 
 

서점 한쪽 면에 '작은 도서관'이라고 적힌 곳이 있었다. 

오래된 책들이고 판매는 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마음껏 읽는 건 허락한다고 쓰여 있었다. 

분명 귀한 책들일텐데... 돈이 되지 않는 일도 하는 그런 너그러움이 좋았다.

그런데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막혀 있어 아쉬웠다. 


특별한 권리를 얻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중년 여성 몇 명이 보였다.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기도 했고, 책을 읽고 있기도 했다. 

작가이거나 문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잠시 '흥' 하며 물러나 다시 구석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며 아무 책이나 펼쳐 서두를 읽었다. 

서서히 주변의 소리가 차단되고 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몇십 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2층 전체가 아주 한산해진 상태였다. 

막혀있던 입구가 열려있었다.


신이 난 나는 작은 도서관의 책장에서 아주 오래된 일기책 한 권을 뽑아 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구나 생각했던 곳으로 들어갔다.  
 


  
   
 























 



   

덧글

  • Juz 2015/11/02 21:49 # 답글

    와 이 시리즈 동선과 감상 변화를 사진과 함께 따라가는 재미도 있지만 책장 할머니는 언제 나오나 이 타이밍인가 이번인가 하는 흥미진진함이 있어요. 으하..
  • Jl나 2015/11/02 22:00 #

    ㅎㅎㅎ 미안해요. 저도 서론이 긴 게 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버리는 걸 잘 못하네요.
    그래도 책 반권이 지나도 주인공도 등장 안하는 어떤 작가의 글처럼 길지는 않으니 봐 주세요 ㅎㅎㅎ

    아침에 눈 뜨고 생각나는대로 쓰고 있기 때문에 저도 길이를 잘 모르겠어요...
  • Juz 2015/11/03 09:25 #

    전 반권 분량도 좋습니다 더 해주세요. 등장인물마다 유심히 보게 되는 적절한 제목인거죠!
    근데 반권 지나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체...
  • Jl나 2015/11/03 16:07 #

    러시아 작가였나 그랬어요 ㅎㅎㅎ (유명한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음 ;ㅁ;;;)
    영어권 사람들이 그를 존경은 하면서도 뽀킹 takes forever to get to the point!! 했던 장면이 떠올라서요 ㅎㅎㅎ
  • Porcupine 2015/11/03 00:28 # 답글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
    무슨 뜻이예요?
  • Jl나 2015/11/03 00:49 #

    낯선 사람을 홀대하지 마세요. 정체를 숨긴 천사일 수 있으니까...
  • Porcupine 2015/11/04 00:13 #

    아, 그런 뜻이었군요.
    그런데 Jl나 선생님 질문있습니다.
    They뒤에 Be동사의 원형이 이어지는게 저한테 익숙하지가 않은데, (주어 뒤에 조동사도 없는데...음) 어떤 문장에서 저렇게 쓰이는지 여쭤봐도 될까유?
    혹시 주어 앞에 있는 Lest와 관계있는건지...


  • Jl나 2015/11/04 00:26 #

    앜ㅋㅋㅋㅋㅋ 이 몇 천 년만에 듣는 문법 질문인가...
    사실 저에게도 어려운 문장이에요. 던서방에게도 시험해 봤죠.
    한 번에 알아듣나 안 듣나... (뭐라고? 하며 다시 물어봅디다.)
    옛날에 쓰이던 문장이라 생각했는데 그렇대요.

    고어체를 보면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극체) 저런 문장들이 나타날 때가 있어요.
    "두려워 마" 이런 말도 요즘은 Don't be afraid. 이런 걸 쓰지만 옛날엔 Fear not.
    이런 걸 썼고요... 그러니까 Don't be 대신 Be not 이런 걸 쓰던 때가 있었어요.

    셰익스피어 문학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저도 공부해야 이해하는 부분입니다.
    현재 사용되는 주어 동사가 없는 건 무시하고, 말이 되도록 해석하시면 되고요
    Lest는 네이버 영한 사전에 보면 "~하지 않도록", "in order not to" 정도로 나와 있는데
    문맥에 따라 다르게 옮겨 줘야겠죠.

    저는 "~할지도 모르니까 (in case)"로 의역/번역했어요.
  • Jl나 2015/11/04 00:28 #

    다른 예문을 보니 lest S + should 문장이 있네요.
    조동사 should 뒤엔 원형이 오고, 실제 사용 시엔 should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으니 be 라는 원형이 오지 않았을까 예상해 봅니다만
    현대인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문장이니 너무 고민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ㅎㅎㅎ 저도 말로 뱉을 일은 없지 않을까 싶어요.
  • Jl나 2015/11/04 00:32 #

    웃기게 직역하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막 대하지 마. 위장한 천사면 어쩌려고 그래?"

    정도가 되겠지요 ㅎㅎ
  • Porcupine 2015/11/04 00:40 #

    앗 그렇게 사용된 것이었군요!
    궁금증 해소 되었습니다.
    Don't be 대신 Be not 을 사용하는건 forget me not 이거랑 비슷한건가봐요.
    친절하고 상세한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 ㅎ

    그리고.."낯선 사람을 홀대하지 마세요. 정체를 숨긴 천사일 수 있으니까..." 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막 대하지 마. 위장한 천사면 어쩌려고 그래?"는 의미는 같지만 뉘앙스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네요 두번째가 더 재밌어요 ㅋ
  • Jl나 2015/11/04 00:41 #

    그래서 번역이 체질에 맞아요... ㅎㅎ
    진지해야 할 때도 자꾸 개그 본능이 솟아올라 문제지만... --;;
  • 미남 2015/11/03 23:37 # 답글

    엄밀히 말하자면 음력도 여러가지 버전이 있어서 한 해의 첫날이 다르답니당. 그래서 루나 뉴이어를 안쓰는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워낙 워낙 개체수가 많다보니....
  • Jl나 2015/11/04 00:09 #

    개체수 ㅎㅎㅎㅎㅎ 가끔 BBC 같은 곳에선 루나 써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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