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할머니 (2) 과거가 괴로운 것이냐 하면




그렇게 멍하니 성당 밖 구석 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더니 

어느새 눈 앞 지평선에 사람들 머리가 바글거리기 시작했다. 

움직일 때가 되었다 싶어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가들이 있는 작은 광장으로 갔다. 

하나둘 자리를 펴기 시작하는 화가들의 모습이 보였다. 

일찌감치 나와 벌써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 모습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캐리커처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캐리커처를 그리면 자기 얼굴의 특징을 잘 알게 되지만  

어쩌면 평생 특정 부위에 대한 컴플렉스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게 무서워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했다. 



7년 전 이곳에서 초상화를 그려받았다. 

그때의 화가들은 이제 그 자리에 없거나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듯 했다. 

그때 반갑게 한국어로 인사하던 한국인 화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사까지 해 줬는데 그녀의 그림을 슬쩍 보곤 미안한 미소로 

대신하며 지나쳤던 때가 생각나 다시 좀 미안했다. 


거리로 나온 모든 사람의 용기를 부러워 한다. 

거리에서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하는 사람들을 봐도 그런 생각을 한다. 

바로 그 자리에 떨어지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피부로 느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당시 광장에 있던 화가들 중 내 눈에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던 할아버지에게 초상화를 부탁했다. 

부르는 값보다 조금 내려봤는데 얼른 "알았으니 자리에 앉아라" 해 기뻤다.

이후에 찾아온 어떤 커플은 제 값을 준다 해도 거의 쫓아보내던 할아버지였다. 

빠글거리는 단발머리에 조개 장식이 달린 연두색 민소매를 입은 동양 여자애가  

더 흥미로운 모델이었나 보다.



누군가를 그리면 그 사람의 몰랐던 모습이 보인다. 

평소보다 훨씬 자세하게 들여다 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눈매가 어떤지, 얼굴 어느 부분이 더 각지거나 둥근지, 

어느 부분에 주름이 있는지, 귀 모양은 어떤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럼 그제서야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했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의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뜯어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흔치 않다. 


그것을 잘 아는 나는 화가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는 듯 했다. 

간단하게 스케치하는 그림이 아닌 자세하게 묘사하는 분이셨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우리 둘의 눈이 마주친 횟수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수백 번은 되는 듯 했다. 

움직이지 마라고 하셨기 때문에 등이 점점 구부정해지고 표정도 어색해지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의 그림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곤 

'오, 정말 비슷해'의 표정이나 '아냐, 영 글렀어. 안 닮았어'의 표정을 보여주며 스쳐갔다. 

그 다양한 반응이 우습고도 민망했으며, 어서 빨리 그림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20여 분이 흐른 뒤 할아버지께서 자랑스럽게 보여준 그림 속의 나는 예쁘지 않았다. 

나와 굉장히 닮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모습의 내가 아니였다. 

못 나온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나인데 마음에 드는 나는 아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게 싫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마음에 드는 척 했다. 

내 반응을 자세하게 들여다 보는 그분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더 활짝 웃으며 얼른 돈을 지불하고 조금 도망치듯이 광장을 빠져나왔던 

그때의 기억이 났다.


그 날 거리에서 붙잡혀 4분의 1 가격(5유로였던가)을 내고 반강제로 그리게 된 

스케치 같은 그림이 사실은 더 매력적이었다.   

전혀 나와 닮지 않았지만 - 길게 찢어진 눈매가 하늘을 찌르고, 입술이 터질 것 같은 

아주 갸름한 얼굴의 여자였다 - 섹시한 여자였다. 


남의 눈에 보이는 내 모습과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의 차이가 

이 정도인가 싶었다. 




다시 오늘, 나는 다른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이젠 결혼을 한 생머리의 여자, 최대한 튀지 않기 위해 화장하지 않은 눈에 안경을 쓰고, 

남편이 입어도 될 법한 큼직한 코트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묵묵히 그림을 그리시는 할아버지의 모습, 거친 손과 낡은 붓자루들이 좋아 몰래 사진을 찍었다.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 좀 떨어진 곳에서 카메라 줌을 사용해 대여섯 장을 찍고 있는데 

역시 등 뒤에서 날 지켜보시던 어느 화가 할머니가 영어로 

"내가 네 사진 찍어줄까?" 하셔서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하곤 괜히 부끄러워 또 도망치듯 광장을 나왔다. 


...갑자기 말을 시키면 당황한다. 

그래도 할머니의 친절에 또 기분이 좋아졌다.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들의 흔적을 스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이 동네 

구석구석에 남긴 흔적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좁고 가파르다 싶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혼자 하는 여행이 좋은 건 기다리게 할 사람, 미안해 할 사람이 없다는 것, 

가고 싶을 때 가고, 서고 싶을 때 설 수 있는 것이다.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갔는데 이제 올라오는 커다란 카메라를 목에 건 남자와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으니 살짝 미소 지으며 지나가려는데 남자가 

"여기" 했다. 

"네?" 하니까 자신의 왼쪽편에 있는 벽을 가리키며 

"어제까지 없던 거였는데 오늘 생겼어요."

했다. 

나는 "오..." 하며 그 벽을 구경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힘이 넘치는 그림이었다. 바라보는 여자의 눈이 무척 매력적인 그래피티였다. 

뒤늦게 '아참' 하며 알려준 그에게 고맙다고 하려 했는데 그는 이미 가고 없었다. 



해가 나며 찬 공기를 데우고 있었고, 

모르는 사람들의 작은 친절들에 점점 기분이 좋아지니 

주변이 예뻐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젊은 남녀의 모습도 귀여웠고, 

'남자가 여자애의 손을 잡으면 좋겠는데...' 싶은 뒷모습도 슬쩍 찍었다. 


몽마르뜨 언덕 꼭대기의 유명한 성당보다 훨씬 덜 알려진 듯한 

또 다른 성당 앞에 선 순간 종이 울렸다. 

무척 아름다운 소리였다. 


행복한 기분으로 고개를 드니 나무 가지 사이에 걸린 하트 풍선이 보였다.

역시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남자가 아는 사람인 것처럼 

내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을 찍어주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 갈 길을 갔다. 

그 사람 덕에 그날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모르는 사람의 그 정도의 방해는 기분 좋은 것이다. 


 



















































덧글

  • 미남 2015/11/02 03:25 #

    호기심에 도전했던 제 초상화도 집안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저랑 닮긴 했어도 제가 바라던 모습이랑은 거리가 있었어요.
    ㅎㅎ
  • Jl나 2015/11/02 04:37 #

    그러게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이사를 몇 번 하니 없어요.
    제가 그린 저도 저랑 그리 안 닮았으니 남 탓할 일은 아니네요 ㅎㅎㅎ
  • 미남 2015/11/02 03:30 #

    나는 이 뒤집어진 결과로..
    나는 이 사랑과는 관계 없는 걸로...
    ㅋㅋㅋㅋㅋ
  • Jl나 2015/11/02 04:37 #

    ...여기 통역 좀 불러주세요.
  • black 2015/11/06 15:14 #

    몽마르뜨 간 지 한달.. 정도밖에 안지났는데 엄청 옛날같아요.
    전 두번째사진 저 너머 계단으로 내려가 점심먹으러 갔었네요.ㅋㅋㅋ
  • Jl나 2015/11/06 15:59 #

    지난 일은 기억에 따라 쉽게 아주 옛날일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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