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악사 과거가 괴로운 것이냐 하면




4월인데 이렇게 더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맑은 날이 계속되었다. 

로마의 거리는 지저분한 듯 유서 깊고, 혼잡한 듯 볼 게 많았다. 


민박집에는 한국 돌아갈 날이 사흘 남았는데 더 이상 유럽에 있기 싫다며 

이틀 일찍 뜨는 비행기로 바꾸곤 신나하는 여학생 하나 뿐이었다. 

민박집의 공짜 전화로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

들뜬 목소리로 그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녀도 나도 혼자 배낭여행 중이었는데 사람이 느끼는 건 이리 다 다르구나 싶었다.

난 외로워서 좋았는데 그녀는 외로워서 미칠 것 같다 했다. 

난 말 시켜줘서 좋던데 그녀는 말 시키는 사람들이 겁 난다 했다. 




여행의 절반이 넘어갈 무렵이라 한식이 그리울 때였고, 

로마 소매치기 소문에 겁을 집어먹고 이탈리아에서만큼은 일부러 한인 민박집을 찾았다. 

부활절이 지났고, 아직 여름 성수기에 접어들기 전이었으므로 한산한 느낌이 있어 걷기 좋았다. 


민박집에서 만난 오빠들과 함께 피자나 사 먹으러 갈까, 커피나 마시러 갈까 하며 

숙소를 나섰다. (그땐 "오빠"라는 말을 참 자연스럽게도 썼군.) 


오빠 1은 인심 좋은 민박집 주인이었고 (어찌 밥을 많이 주는지 여행하며 빠진 살이 도로 쪘다.)

오빠 2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대해 수시간 동안 떠들 수 있는 현지 가이드였다. 

오빠 3은 한인 교포라 하였는데 로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호했다. 

자신에겐 형님"은"보다 형님"는"이 더 발음하기 쉬운데 아무도 이해시켜 주지 않는다 불평하여 

날 고민에 빠지게 했다. 


로마니까 괜히 치마를 입었다. 로마풍인지 그리스풍인지 알지 못할 그런 옷이었다. 

위 아래 모두 검은색으로, 몸에 별로 붙지 않으나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긴 비대칭 옷이었다.

사선으로 길게 내려오는 페이즐리 무늬가 있는 베이지색 인도 가방을 맸고, 

걸으면 비드가 찰랑찰랑거리는 편안한 글레디에이터 샌들도 신었다.   
 

오빠들과 함께 어느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새파란 것들이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질렀다. 제법 먼 곳에 있는 혹시 나에게 그런 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니 민박집 오빠가 너무 익숙하다는 듯 

"저것들이... 또 여자 봤다고 저러네. 하여간 동양 여자라면 사족을 못 써요." 

하길래 푸핫 웃으며 

"잘 보이지도 않는데 정말 그렇겠어요?" 

했더니 

"응. 저것들은 그래. 동양 여자들은 피부결이 다르다며 그런다고."

했다. 다른 오빠들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이탈리아 남자애들의 시선이 우습기도 민망하기도 하여, 어차피 가던 길 쭉 가면 되니까 

대로변으로 나갔다. 그러다 또 한 명의 한국인을 마주쳤다. 오빠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어이구 어디 가세요? 요즘 장사는 잘 돼요?" 등의 안부를 묻고 이 아가씨는 누구냐 하여 

민박집 손님이라 하니 어이구 왜 예쁜 여자만 데리고 다녀 등의 뻔한 소릴 했다. 

역시 민박집을 운영하는 듯 했다. 


이탈리아에서 꽤 오래 살았다 하였고, 공부도 했다 하고, 40대가 되었을까 싶은 

젊었을 땐 여자 꽤나 만났겠구나 싶은 외모의 사람이었다. 

어쩐지 이탈리아스러운 습관성 칭찬 한 마디에도 그런 게 묻어났다. 

오빠들이 뭘 자꾸 부추기는가 싶었다. "한곡 뽑아줘요"라 했던가?

로마 대로변에서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있는데 

정말 그 아저씨가 큰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이태리에서 성악 공부하셨구나.'

상당한 충격과 놀라움에 빠진 나는 멀거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의 목소리에 담긴 열정이 어찌나 큰지

그의 눈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건 말건, 어쩌면 한때 꿈이었을지 모를 

성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분명히 러브송일 이탈리아 오페라를 열창하는 

그에게서 약간 감동했다. 

한국인도 로마에 오면 이렇게 남을 의식하지 않고 로맨틱해질 수 있구나 싶었다.


노래가 끝나자 오빠들과 나는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오빠들은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루마니아에서 왔는지 아닌지 애매한 

집시 노파가 화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뭐라고 뭐라고 자기 나라 말로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저었다. 

난생 처음 겪은 강렬한 암내에 우리 모두는 주춤했다.    

우리는 단체로 "으악 우웩!!" 거리며 서로에게 작별했다. 


그분이 가던 길을 가고,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는데 오빠 1이 그랬다. 

"좋댄다 새끼..."

오빠 2가 그랬다. 

"그새 얘한테 뻐꾸기 날리는 거 봤냐?"

오빠 3이 그랬다. 

"재수 없는 새끼..."



난 그 자리에서 빵 터져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니... 노래하라고 단체로 부추겨 놓고...' 



돌아서자마자 단체로 돌변하는 그들의 태도에 

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남자들도 뒷담화 한다. 




 
  



덧글

  • santalinus 2015/10/16 17:37 #

    ㅋㅋㅋㅋㅋㅋㅋ맞아요! 이건 남녀 공통, 국적 공통 사항임!!!!^^ 제가 말이죠, 뒤에서 안까는 외국인을 한명도 못봤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그 '오빠들' 되게 웃기는 사람들이네요. 지들이 부추겨서 노래부르게 해놓고선 뒤에서;;;;;
  • Jl나 2015/10/16 19:23 #

    어찌 놀랐는지 너무 웃겼어욬ㅋㅋㅋㅋ
    역시... 오렌지님 말씀처럼 남자들은 여자들이 "매력 있다" 생각하면 "재수 없다" 생각하는가...
    여자도 마찬가지인가...
  • 미남 2015/10/18 10:30 #

    그냥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이랄까....


    립서비스 때문에 열받은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Jl나 2015/10/19 03:49 #

    남자들이 가감 없이 쿵짝을 맞추는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전에는 몰랐던 면이랄까 ㅎㅎㅎ

    '니가 남자를 알긴 뭘 알아...' 싶었어요.
  • 제트 리 2015/10/23 18:28 #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죠..... 저도 그렇게 될 까봐 조심을 할려곤 합니다만...
  • Jl나 2015/10/24 02:35 #

    ㅎㅎㅎ 좀 충격받긴 했지만 완전 솔직해서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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